Fat-free chocolate and absolutely no smoking: why our guilt about consumption is
all-consuming (By Salvoj Zizek)
무지방 초콜렛과 절대 금연: 왜 소비에 관한 우리의 죄책감이 최고의 소비인가 (슬라보예 지젝)

From fear of being seen smoking to Starbucks' 'coffee karma', we've arrived at a cultural impasse as consumers. 
As 2014's Prix Pictet photography prize tackles the theme of consumption, Slavoj Žižek traces how we've ended up 
buying into lifestyles rather than living our lives

흡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스타벅스의 ‘커피 카르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소비자들로서 하나의 문화적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2014년의 프릭스 픽텟 사진상이 소비를 테마로 했듯이, 슬라보예 지젝은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기보다는 라이프 스타일에 동참하는 것으로 끝났는지 추적한다

* 출처: 가디언 / 2014년 5월 21일
http://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4/may/21/prix-pictet-photography-prize-consumption-slavoj-zizek

* 번역: 정성철 cittaa@gmail.com

During a recent visit to California, I attended a party at a professor's house with a Slovene friend, a heavy smoker. 
Late in the evening, my friend became desperate and politely asked the host if he could step out on the veranda for a 
smoke. When the host (no less politely) said no, my friend suggested that he step out on to the street, and even this 
was rejected by the host, who claimed such a public display of smoking might hurt his status with his neighbours … 
But what really surprised me was that, after dinner, the host offered us (not so) soft drugs, and this kind of smoking 
went on without any problem – as if drugs are not more dangerous than cigarettes.

최근 캘리포니아를 방문하는 동안 나는 슬로베니아 친구 한 명과 함께 한 교수의 자택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밤이 이슥해지자 내 친구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주인에게 정중히 물었다. 주인이 (못지않게 정중하게) 노라고 말했을 때, 내 친구는 집 앞으로 나가서 피우는 것은 괜찮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주인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런 공공공한 흡연 모습은 이웃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이 떨어지게 할 것이라면서 말이다 ... 그러나 정말로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주인이 우리에게 (그렇게 약하지 않은) 대마초를 권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흡연은 아무 문제도 없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 마치 마약이 담배보다 더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This weird incident is a sign of the impasses of today's consumerism. To account for it, one should introduce the 
distinction between pleasure and enjoyment elaborated by the psychoanalyst Jacques Lacan: what Lacan calls 
jouissance (enjoyment) is a deadly excess beyond pleasure, which is by definition moderate. We thus have two extremes: on the one hand the enlightened hedonist who carefully calculates his pleasures to prolong his fun and avoid getting 
hurt, on the other the jouisseur propre, ready to consummate his very existence in the deadly excess of enjoyment – 
or, in the terms of our society, on the one hand the consumerist calculating his pleasures, well protected from all kinds 
of harassments and other health threats, on the other the drug addict or smoker bent on self-destruction. Enjoyment 
is what serves nothing, and the great effort of today's hedonist-utilitarian "permissive" society is to tame and exploit 
this un(ac)countable excess into the field of (ac)counting.

이 기묘한 사건은 오늘날의 소비지상주의의 막다른 골목을 가리키는 증후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정교화한 쾌락과 향유 사이의 구별을 도입해야 한다: 라캉이 쥬이상스 (향유)라고 부르는 것은 정의상 온건한 쾌락의 치명적인 초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극단들을 갖는다: 한편에서는 재미를 연장하고 상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쾌락들을 조심스럽게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 다른 한편에서는 향유의 치명적인 초과 속에서 자신의 바로 그 존재를 극점에 달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고유한 의미의 향유추구자 - 또는 우리 사회의 용어들로는, 한편에서는 모든 종류의 골칫거리들 및 다른 건강 위협들로부터 보호받는, 자신의 쾌락들을 계산하는 소비지상주의자,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파괴 경향을 갖고 있는 마약 중독자 또는 흡연자. 향유는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는 것이며 오늘날의 쾌락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관대한” 사회의 커다란 노력은 이 계산할 수 없는 초과를 완화시켜 계산할 수 있는 것의 장 속에서 이용해 먹는 것이다.

Enjoyment is tolerated, solicited even, but on condition that it is healthy, that it doesn't threaten our psychic or 
biological stability: chocolate, yes, but fat-free; Coke, yes, but diet; coffee, yes, but without caffeine; beer, yes, but 
without alcohol; mayonnaise, yes, but without cholesterol; sex, yes, but safe sex …

향유는 관용되고, 심지어 권장되기도 하지만 건전하다는, 우리의 심적 또는 생물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만 그렇다: 초콜렛, 좋다, 그러나 무지방이어야 한다; 콜라, 좋다, 그러나 다이어트 콜라이어야 한다; 커피, 좋다, 그러나 카페인이 없어야 한다; 맥주, 좋다, 그러나 알콜이 없어야 한다; 마요네즈, 좋다, 그러나 콜레스테롤이 없어야 한다; 섹스, 좋다, 그러나 안전해야 한다 ...

So, what is going on here? In the last decade or so there has been a shift in the accent of marketing, a new stage of 
commodification that the economic theorist Jeremy Rifkin designated "cultural capitalism". We buy a product – an 
organic apple, say – because it represents the image of a healthy lifestyle. As this example indicates, the very ecological 
protest against the ruthless capitalist exploitation of natural resources is already caught in the commodification of 
experiences: although ecology perceives itself as the protest against the virtualisation of our daily lives and advocates a 
return to the direct experience of sensual material reality, ecology itself is branded as a new lifestyle. What we are 
effectively buying when we are buying "organic food" etc is already a certain cultural experience, the experience of a 
"healthy ecological lifestyle".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지난 10여 년 동안 마케팅의 강조점에 하나의 전환이 있었다. 경제 이론가 제레미 리프킨이 “문화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상품화의 새로운 단계이다. 우리는 한 제품 - 유기농 사과 등등 -을 그것이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구매한다. 이 예가 가리키듯이, 자연자원의 가차 없는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선 생태학적 저항은 이미 경험들의 상품화에 사로잡혔다: 비록 생태학은 그 자신을 우리의 일상생활의 가상화에 맞선 저항으로 지각하고 감각적 물질적 현실의 직접 경험으로의 회귀를 옹호하지만, 생태학 그 자체에 하나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상표가 붙었다. 우리가 “유기농 식품” 등을 구매할 때 결국 구매하는 것은 이미 어떤 문화적 경험, “건전한 생태학적 라이프 스타일” 경험이다.

And the same goes for every return to "reality": in a publicity spot widely broadcast in the US a decade or so ago, a 
group of ordinary people was shown enjoying a barbecue with country music and dancing, with the accompanying 
message: "Beef. Real food for real people." The irony is that the beef offered here as the symbol of a certain lifestyle 
(the "real" grass-root working-class Americans) is much more chemically and genetically manipulated than the 
"organic" food consumed by an "artificial" elite.

“현실”로의 모든 귀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미국에서 10여 년 전 자주 방송되었던 한 삽입 광고에서, 컨트리 음악을을 듣고 춤을 추며 바비큐를 즐기는 일단의 보통 사람들이 화면에 나왔다. 메시지는 이랬다: “소고기. 진짜 사람들을 위한 진짜 음식.” 아이러니는 여기서 어떤 라이프 스타일 (“진짜” 풀뿌리 노동계급 미국인들) 의 상징으로 제공되었던 소고기가 “인위적인” 엘리트들이 소비하는 “유기농” 식품보다 훨씬 더 화학적 및 유전공학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What we are witnessing today is the direct commodification of our experiences themselves: what we are buying on 
the market is fewer and fewer products (material objects) that we want to own, and more and more life experiences – 
experiences of sex, eating, communicating, cultural consumption, participating in a lifestyle. Michel Foucault's notion 
of turning one's self itself into a work of art thus gets an unexpected confirmation: I buy my bodily fitness by way of 
visiting fitness clubs; I buy my spiritual enlightenment by way of enrolling in the courses on transcendental meditation; 
I buy my public persona by way of going to the restaurants visited by people I want to be associated with.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경험들 자체의 직접적인 상품화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점점 더 우리가 소유하기 원하는 제품들 (물질적 대상들) 보다는 생활경험들 - 섹스 경험, 먹기 경험, 소통 경험, 문화적 소비 경험, 라이프 스타일에 참여하기 경험들 을 더 많이 구매하고 있다. 이렇게해서 자신의 자아를 예술작품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미쎌 푸코의 생각은 뜻밖의 확증을 얻는다: 나는 피트니스 클럽에 방문해 나의 신체적 피트니스를 구매한다; 나는 초월 명상 강좌에 등록해 나의 정신적 계몽을 구매한다; 나는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레스토랑에 가는 것에 의해 나의 공적인 외적 인격을 구매한다.

The anti-consumerist ecology is also a case of buying authentic experience. There is something deceptively reassuring 
in our readiness to assume guilt for the threats to our environment: we like to be guilty since, if we are guilty, it all 
depends on us. We pull the strings of the catastrophe, so we can also save ourselves simply by changing our lives.

반소비지상주의적 생태학 또한 진정한 경험 구매하기의 한 사례이다. 환경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순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에는 어떤 기만적으로 안심시키는 것이 있다: 우리는 죄책감을 느낀다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가 재난들을 촉발한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단순히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다.

What is really difficult to accept (at least for us in the west) is that we are reduced to the impotent role of a passive 
observer who can only sit and watch what his fate will be. To avoid such a situation, we are prone to engage in a 
frantic obsessive activity, recycling old paper, buying organic food, whatever, just so that we can be sure that we are 
doing something, making our contribution – like a soccer fan who supports his team in front of a TV screen at home, 
shouting and jumping from his seat, in a superstitious belief that this will somehow influence the outcome …

우리 (적어도 서구에 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앉아서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를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수동적 관찰자라는 무능력한 역할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기여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는 폐지 재활용하기, 유기농 식품 사기 등등 같은 미친 듯이 강박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든 경기 결과에 영향을 끼치리라는 미신적인 믿음 속에서 소리도 지르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기도하면서 집의 TV 스크린 앞에 앉아 그의 팀을 응원하는 축구 팬처럼 말이다 ...

Is it not for the same reason that we buy organic food? Who really believes that the half-rotten and expensive 
"organic" apples are really healthier? The point is that, by buying them, we do not just consume a product – we 
simultaneously do something meaningful, show our caring selves and our global awareness and participate in a 
large collective project.

우리가 유기농 식품을 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닌가? 누가 정말로 반쯤 상한 값비싼 “유기농” 사과가 정말로 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고 믿는가? 요는 그것들을 구매하는 것에 의해 우리가 단순히 하나의 제품을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는 다는 것 - 우리가 동시에 의미 있는 어떤 것을 한다는 것, 우리의 배려하는 자아들과 우리의 전반적인 자각을 보여주고 커다란 집단적 기획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One should not fear denouncing sustainability itself, the big mantra of ecologists from the developed countries, as 
an ideological myth based on the idea of self-enclosed circulation where nothing is wasted. Upon a closer look, one 
can establish that "sustainability" always refers to a limited process that enforces its balance at the expense of its larger 
environs. Think about the proverbial sustainable house of a rich, ecologically enlightened manager, located somewhere 
in a green isolated valley close to a forest and lake, with solar energy, use of waste as manure, windows open to natural 
light, etc: the costs of building such a house (to the environment, not only financial costs) make it prohibitive to the large majority. For a sincere ecologist, the optimal habitat is a big city where millions live close together: although such a city 
produces a lot of waste and pollution, its per capita pollution is much lower than that of a modern family living in the 
countryside. How does our manager reach his office from his country house? Probably with a helicopter, to avoid 
polluting the grass around his house …

우리는 선진국들 생태학자들이 가장 떠받드는 진언(眞言)인 “유지가능성”을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는 자기완결적 순환이라는 생각에 토대하고 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신화라고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우리는 “유지가능성”이 언제나 그것의 더 큰 환경을 희생하고 그것의 균형을 강제하는 제한된 과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숲과 호수 가까이 있는 외딴 녹지 계곡 어딘가에 위치한, 부유한, 생태학적으로 계몽된 매니저의 이름난 유지가능한 가옥에 관해 생각해보라.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고 폐기물을 거름으로 사용하며 창문들은 자연광을 받도록 되어 있는 등등: 그러한 가옥을 짓는 비용 (재정적 비용만이 아니라 환경이 치르는 비용) 은 그것을 대다수에게 금지되어 있는 것이 되게 한다. 성실한 생태학자에게, 최적의 주거지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사는 대도시이다: 비록 그러한 도시는 많은 쓰레기와 오염을 발생시키지만, 그것의 일인당 오염치는 전원에서 사는 한 현대적인 가족의 그것보다 훨씬 낮다. 어떻게 우리 매니저는 그의 전원 가옥에서 그의 사무실로 출근하는가? 아마도 그의 가옥 둘레의 초목들을 오염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탈 것이다 ...

To recap, we thus primarily buy commodities neither on account of their utility nor as status symbols; we buy them to 
get the experience provided by them, we consume them in order to make our life pleasurable and meaningful.

요약하면, 우리는 이와 같이 일차적으로 상품들을 그것들의 효용 때문에 구매하지도 지위 상징들로서 구매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이 제공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 그것들을 구매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즐겁게 하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소비한다.

Here is an exemplary case of "cultural capitalism": Starbucks' ad campaign "It's not just what you're buying. It's what 
you're buying into." After celebrating the quality of the coffee itself, the ad goes on: "But, when you buy Starbucks, 
whether you realise it or not, you're buying into something bigger than a cup of coffee. You're buying into a coffee 
ethic. Through our Starbucks Shared Planet programme, we purchase more Fair Trade coffee than any company in 
the world, ensuring that the farmers who grow the beans receive a fair price for their hard work. And, we invest in and 
improve coffee-growing practices and communities around the globe. It's good coffee karma. … Oh, and a little bit of 
the price of a cup of Starbucks coffee helps furnish the place with comfy chairs, good music, and the right atmosphere 
to dream, work and chat in. We all need places like that these days. When you choose Starbucks, you are buying a cup of coffee from a company that cares. No wonder it tastes so good."

여기 “문화 자본주의”의 한 범례적 사례가 있다: 스타벅스의 광고 캠페인 -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구매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동참하느냐이다.” 커피 자체의 품질을 치켜세운 후, 광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나, 당신이 스타벅스를 구매할 때, 깨닫고 있던 그렇지 않던, 당신은 한 잔의 커피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동참하고 있다. 당신은 하나의 커피 종족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 스타벅스의 공유된 행성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커피 원두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그들의 고된 노동에 대해 공정 가격을 받을 수 있도록 어느 다른 회사보다도 더 많은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세계의 커피 재배 활동들과 커피 재배 지역사회들에 투자하고 그것들을 개선한다. ... 그것은 훌륭한 커피 카르마이다. ... 스타벅스 커피 한잔 가격의 약간은 그곳에 편안한 의자들, 좋은 음악들, 그리고 꿈꾸고, 일하고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적당한 분위기를 제공하는데 일조한다. 당신이 스타벅스를 선택할 때, 당신은 배려하는 회사의 커피을 구매하고 있다. 커피 맛이 그토록 좋은 것은 당연하다.”

The "cultural" surplus is here spelled out: the price is higher than elsewhere since what you are really buying is the 
"coffee ethic" that includes care for the environment, social responsibility towards the producers, plus a place where 
you yourself can participate in communal life.

“문화적” 잉여분은 여기서 명백하다: 가격은 당신이 정말 구매하고 있는 것이 생산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환경을 배려하는 “커피 윤리”, 그리고 그것에 더해 당신 자신이 공동체적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더 높다.

This is how capitalism, at the level of consumption, has integrated the legacy of 1968, the critique of alienated 
consumption: authentic experience matters. A recent Hilton hotels ad consists of a simple claim: "Travel doesn't only 
get us from place A to place B. It should also make us a better person." Can one even imagine such an ad a decade 
ago? The latest scientific expression of this "new spirit" is the rise of a new discipline, "happiness studies" – how is it that, 
in our era of spiritualised hedonism, when the goal of life is directly defined as happiness, anxiety and depression are 
exploding?

이것이 소비 수준에서 자본주의가 1968년의 유산을, 소외된 소비에 대한 비판을 통합한 방식이다: 진정성 있는 경험이 중요하다. 최근 힐튼 호텔 광고는 단순한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행은 우리를 장소 A에서 장소 B로 가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십년 전이라면 그런 광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새로운 풍조”의 가장 최근의 학문적 표현은 “행복 연구”라는 새로운 분과학의 등장이다 - 삶의 목적이 직접적으로 행복으로 정의되는 우리 정신화된 쾌락주의 시대에 불안과 침울이 분출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Posted by Happy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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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과 동안의 차이는 '환경·유전적'

http://www.medical-tribu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438



해당 뉴스기사에 대해 sbs 보도국 골라듣는 뉴스룸 팀에서 팟캐스트를 녹음했네요


노화와 노안등에 대한 건강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송인것 같아 뉴스기사와 같이 포스팅 합니다.







 - 팟캐스트 설명 :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3배 더 빨리 늙기도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겉보기에 늙어 보이는 사람은 실제 생체 나이도 늙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노화는 반드시 피해야 할 어떤 것일까요?

노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그리고 노화의 비밀은 무엇인지 뽀얀거탑에서 알아봤습니다.




Posted by Happy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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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계획을 세우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인터넷 중독의 원발성 정도이다. 즉, 중독자의 과다 인터넷 사용이 기존 정신병리의 발현이거나,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갈등을 표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통상적인 정신과 진료지침을 따르면 된다. 필요하다면 기분 조절제, 항 우울제 등의 약물도 투여할 수 있다. 그러나 별다른 배경이 없는 원발성 인터넷 중독의 경우는 자기 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 통제를 하는 인지-행동치료적 접근이 유효하다. 이하의 내용은 원발성 인터넷 중독의 인지-행동치료적 접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가. 인터넷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1) 인터넷 만큼 재미있는 일, 또는 인터넷 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만든다. 


이것은 인터넷 중독의 치료뿐만 아니라, 인터넷 중독의 예방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항상 하고 싶었던 취미가 있으면, 바로 지금이 시작할 만한 때이다. 헬스 클럽에 가고 싶었으면, 바로 지금 회원 가입을 하도록 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가 생각이 나면 지금 당장 연락해서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도록 한다. 인생에서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오프라인에서의 삶이 더 재미있는 것일수록, 사이버 공간에 대한 향수(?)는 더 줄어들 것이다. 


(2) 전체적인 인터넷 사용 패턴을 분석한다. 


이미 인터넷이 삶의 모든 영역을 정복해 버렸고, 위와 같은 방법으로 벗어나기가 어렵다면 이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나의 상황은 어떤가? 인터넷 접속 시간은? 일주일 중에서 주로 온라인에 들어가는 날이 언제인가? 접속해서는 주로 무얼 하지? 특정 모임에 얼마나 머무는가? 컴퓨터를 주로 어디에서 사용하는가? 그 결과는? 등등의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전문 치료자가 개입하여 이런 질문들을 중독자에게 던지고 중독자가 그 답을 직면하도록 해야 한다. 많은 온라인 중독자는 기본적으로 문제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부정하는 성향을 알기 위해, 또는 주변 사람들이 중독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정의 표현양식을 알아야 한다. 이런 유형으로는 완강한 부정, 축소, 떠넘기기, 핑계, 합리화,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독자의 온라인 접속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치료의 첫 단계가 된다. 전문 치료자로서의 필자도 중독자를 만나면 이 단계에서부터 시작한다. 


** 온라인 접속 시간 계산 


인터넷 사용시간을 정확히 알기 위해, 또는 인터넷 중독 증상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 접속 시간을 도표로 그려보는 것이 좋다. 우선 좋아하는 온라인 작업과 그 정도를 분야별로 나누어 본다. 특히 현실감을 갖춘 사람으로 하여금 계산을 해보도록 하면, 각 인터넷 애플리케이션별로 주당 소비 시간을 추정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총 접속 시간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점검 표를 활용하면 어느 곳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채팅 룸 : 주당 얼마나 오래 있는가? 방문하는 채팅 룸의 종류를 모두 적어본다. 

- 인터액티브 게임 : 시간은? 각종 게임의 종류를 적어본다. 

- 전자우편 : 매일 주고받는 메시지가 얼마나 되는지 적어본다. 

- 동호회 등의 커뮤니티 활동 : 시간은? 참여하고 있는 동호회를 모두 적어본다. 

- 웹사이트 방문 : 시간은? 좋아하는 웹사이트를 주제별로 정리해본다. 

- 기타 :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항목과 주당 시간을 적어본다. 이렇게 하면 좋아하는 온라인 장소를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며 일상생활에서 각 부분별로 얼마나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를 토대로 다음에 언급할 인터넷 사용 주간 일정표를 작성하게 된다. 이렇게 온라인 접속시간을 계산한 후에는 이로 인해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파악하도록 한다. 


** 인터넷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줄어들었거나 사라지게 된 것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어 보도록 한다.인터넷을 접하면서 소홀히 했거나 줄어들게 된 모든 활동이나 습관들을 적어보되, 중요도에 따라 1에서 3까지 등급을 매겨본다. 이때 인터넷을 하기 이전의 생활에 대해 정확히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 본다. 

- 인터넷을 알기 전에는 그 일에 얼마나 애정을 쏟았었던가? 

- 내 감정이 실제로 변한 것인가? 아니면? - 그런 일들이 진정 내 생활의 질을 높였던 것들이 아니었던가? 

- 내가 그 일을 진짜로 하지 않으려 한 적이 있었는가? 목록에 올려진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면서 인터넷이 중요한지 그 일이 더 중요한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본다. 그럼으로써 인터넷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충분히 평가하도록 한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본다. 


**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 


- 나의 인터넷 사용이 다른 사람(예: 아내, 부모 등)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 인터넷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가? 

- 1년 정도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면, 학교나 회사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있게 될까? 

- 그 많은 시간, 열정,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 이 새로운 것에 집착하기 전에 나는 누구였는가? 

- 그리고, 이제 그런 나의 모습을 영영 포기할 것인가? 


(3) 이렇게까지 된 원인이나 소인에 대해 파악해 보고 가능하다면 그것부터 교정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독자들은 인터넷 사용 전에 이미 심리적인 취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로서는 외로움, 자신감 결여, 자신의 어려운 처지, 현실에서의 고통 등등일 것이다. 먼저,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온라인 관계는 결코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불꽃처럼 일어난다. 금세 불이 붙지만, 또한 쉽게 사그라진다. 현실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관계가 서서히 시작되고 서서히 끝난다, 천천히 뜨거워지고 천천히 식는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의 관계는 시작하기가 어렵지만 그 만큼 충족감이 깊고 크다. 결국 인터넷 중독자들은 사람으로 사는 어려운 과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도 현실에서 외로움에 직면하여 이를 더 훌륭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자신의 긍정적 특성들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이다. 중독자가 이미 온라인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이라면(그래서 중독이 되었겠지만), 직장, 학교, 시장에서 마주치는 일상 생활에서도 인기를 얻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사이버에서 된 것이면 현실에서도 될 수 있다. 그것이 소위 가상 현실이라는 것 아닌가.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했을 때나, 모임에서 주목을 끌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자신감을 오프라인 현실에서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면 현실 세계의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중독자 자신이 처한 상황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도록 한다.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외로움을 부추기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파악해본다. 고립된 시골에서 벗어나 좀 더 자극적인 도시로 이사 갈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출장이나 시간외 근무가 적은 직장으로 바꾸면 퇴근 후에 취미 활동을 더 많이 가질 기회가 생기지 않겠는가? 한 달에 두 시간 정도의 낮 시간만이 생겨도 사회 단체나 클럽에 새로 가입하여 관심사와 걱정거리를 공유할 새 친구를 만들 수 있다. 신체적으로 변화가 필요할 수도 있다. 너무 살이 쪄서 그 동안 현실세계에서의 접촉을 피했다면, 익명의 인터넷 공동체로 빠지는 대신에 자신의 건강과 외모에 대해 뭔가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계속 컴퓨터 앞에서 환상에만 빠져 있다면 아랫배와 엉덩이만 더 늘어질 뿐이다. 다른 중독에서도, 중독자는 현실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피하려고 하다가 더 큰 고통에 빠지는 사람들이다(알코올 중독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인터넷 중독자들은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며 그 동안은 고통을 직면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직업을 구할 상황이면 그래야 하고, 학업 성적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후원단체에 가입하거나,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원봉사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다. 때에 따라서는 정신과에서 행해지는 정신치료가 중독자의 외로움, 분노, 공포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혀주고 이를 적절히 표현하도록 도와 줄 수도 있다. 


(4) 인터넷 사용 시간에 대한 주간 일정표를 작성한다. 


인터넷 사용에 대한 절제를 시작하는 첫 단계는 시간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계획과 목표가 있어야 통제할 수 있다. 인터넷 이용에 제약을 가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이유는, 무작정 시간을 줄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합리적인 목표, 즉 현재 주당 40시간 동안 인터넷을 하고 있다면 주당 20시간 정도로 줄이는 식의 목표를 정한다(넷밸류 코리아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2001년 5월 한달 간 우리나라의 개인별 인터넷 사용 시간은 월 평균 19시간이라고 함). 다음에는 이 20시간을 기준으로 사용 시간표를 작성하되 주간 또는 월간 단위로 구체적으로 작성한다. 접속 항목들은 중독자가 인터넷으로 꼭 해야 하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포함시키되 가급적 접속 시간은 짧게 하고 대신 자주 들르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금단 증상이나 강박적 욕구를 피할 수 있고, 정기적으로 2시간씩 정도만 접속을 하면 시간 왜곡경험에 빠지지 않게 될 수도 있다. 20시간 계획표의 예를 들어보면, 평일에는 밤마다 8시부터 10시까지 인터넷을 사용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사용하도록 한다. 힘든 하루였을 때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짧게 채팅 모임에 들어갈 수도 있다. 사실 "하루에 한번"은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의 12단계 재활 프로그램에서 강조되는 주제이다. 인터넷 중독의 경우에도 비슷한 식으로 "하루에 한번"을 모토로 할 수 있는데, 이는 매일 짧게, 정해진 시간 동안만 인터넷을 사용하거나 지정된 일정에 따라 사용하는 식을 의미한다. 인터넷 사용에 가시적인 일정을 포함시키게 되면 인터넷이 중독자를 통제하고 있다기보다는 중독자가 인터넷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5) 인터넷 사용 습관을 바꾼다. 


인터넷 사용 시간을 줄이려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인터넷을 사용해온 습관이다. 사실, 습관대로 따라 한다면 사용 시간은 하나도 줄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인터넷 사용 습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반대로 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습관에 혼란이 오면서 새로운 행동패턴을 만들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전자우편을 확인해 보는 것으로 인터넷을 시작하던 사람이라면 먼저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인터넷은 오후 일과가 끝날 무렵에 접속하도록 한다. 전자 우편을 반나절 늦게 본다고 무슨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 인터넷을 밤에만 주로 사용하면서 잠잘 시간을 훨씬 지나서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인터넷은 낮에만 사용하도록 한다. 평일 밤마다 사용한다면 주말까지 기다리도록 하고, 주말 내내 사용한다면 평일 밤에만 하도록 바꾼다. 인터넷에서 신문을 읽는 것으로 인터넷 사용을 시작한다면 대신에 인쇄된 종이 신문을 구독하여 읽도록 한다. 서재에서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거실로 옮겨 놓도록 한다. 특정 인터넷 사용에 몰두했던 사람은 금단 증상을 일으키지 않을 범위에서 그 인터넷 사용만 중점적으로 절제해 나가고 다른 인터넷 사용은 방임한다. 이러한 절제는 특히 이전에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남용의 과거력이 있었던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다. 


(6) 시간 왜곡 경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외부 방해물을 이용한다. 


인터넷을 중단할 때를 알려주고 온라인 시간을 조정해줄 수 있는 프롬프터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나 가야만 할 어떤 약속을 활용한다. 오전 7시 30분에 출근해야 한다면 오전 6시 30분에 인터넷에 들어가면서 정확히 한시간만 하고 끝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아니면, 화요일 오후 8시에 강의가 있다고 하자. 그날 저녁 6시 30분에 온라인에 들어가 강의에 참가하러 떠나기 전까지만 있도록 한다. 오후 12시 30분에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다면, 오전 10시 30분에 온라인에 들어가 약속시간까지 2시간만 인터넷을 하도록 한다. 오후 6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하면, 5시 30분부터 한시간만 사용하도록 한다. 또한, 아내가 들어오기 한시간 전에 온라인 모임에 들어가 아내가 도착하면 그만두겠다고 다짐을 하거나, 아이들 발표회에 가기 전 1시간 동안만 할 수도 있다. 


(7) 인터넷 사용을 줄여나가는데 따른 보상책을 준비해 둔다.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탐닉해 있던 인터넷 사용을 줄여 나가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그에 따른 보상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보상책은 중독자 스스로 만드는 것일 수 도 있고, 주위에서 만들어 주는 것일 수 도 있는데, 어느 경우든 가까운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원과 협조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인터넷 사용시간을 반으로 줄이면 평소에 갖고 싶었던 선글라스를 본인이 사거나 누군가가 사주는 것과 같은 보상책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 간단한 방법으로는, 인터넷 사용을 줄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을 적은 카드를 만들어 놓고, 생활 중에 계속 그 카드를 들여다보면서 좋은 점을 상기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한 지지그룹을 선정해서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보상책이 되는데 이는 앞서 서술한 대로 인터넷 중독자들은 대개 인간적 지지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지그룹은 특정 상황에서 중독자의 인간관계를 형성해 줄 수 있고 자기 조절 능력을 강화시키며 온라인에 대한 의존성을 감소시킬 것이다. 만약 환자가 혼자 지내는 생활 패턴이라면 대인관계 형성을 위한 모임, 독신자를 위한 모임, 볼링 모임, 종교 모임 등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8) 인터넷으로 인해 손상된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전문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인터넷 중독으로 인해 부부나 가족 관계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가족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흔히 시행되는 방식은 아래와 같다. 

- 인터넷 중독성에 대해 가족들에게 교육을 하고, 

- 인터넷 중독 양상에 대한 비난을 줄이며, 

- 인터넷 중독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가족 내 문제점에 대해 대화창구를 개방하고, 

-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가족들을 격려한다. 




나. 회복의 징후 


(1) 인터넷 사용 계획을 잘 지키며, 계획된 주당 총 사용 시간을 넘지 않는다. 

(2) 배우자나 부모들이 보기에 인터넷 사용 습관과 자신들에 대한 행동이 달라졌다고 한다. 

(3) 온라인 서비스 요금을 엄격히 관리하고, 정한 범위 내에서만 사용한다. 

(4) 이전의 상태와 거의 유사한 수준으로 제때에 회사일과 학교 공부, 집안 일을 한다. 

(5) 이전에 좋아했던 취미와 다른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6) 인터넷 상의 낯선 사람보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사귀는데 더 노력한다. 

(7) 인터넷에 집착하는 다른 사람을 대하면 부정적 시각으로 보게 되고, 그 사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8) 타당한 이유로 인터넷을 하거나 일정한 범위 내에서 오락 삼아 인터넷을 하게 될 때, 옛 버릇이 다시 발동할 유혹을 덜 느끼게 된다. 

(9) 인터넷의 사용이 게임, 채팅 등의 오락적 요소보다 자기 업무와 관련된 쪽으로 기운다. 

(10)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외출하고 친구와 사귀고 싶은 생각이 더 커진다. 초대를 거부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11) 인터넷에 중독 되었던 때를 돌아보면, 다른 시간의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다. 인터넷 중독에 대하여 전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웹사이트들 


* 청년의사 인터넷 중독 치료 센터 : http://netmentalhealth.fromdoctor.com

* 사이버 중독 정보센터 : http://www.cyadic.or.kr

* Center for Online Addiction : http://www.netaddiction.com

* 학부모 정보 감시단 : http://cyberparents.icec.or.kr

* 청소년 정보 감시단 : http://cyc.youth.re.kr

* 한국 컴퓨터 생활연구소 : http://www.computerlife.org

* 국립 사이버 정신병원 : http://www.ncmh.go.kr

* 건전한 청소년 사이버 문화 조성 캠페인 : http://www.safe-i.or.kr




라. 인터넷 중독 예방법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중독 역시 한번 빠져들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므로 예방이 최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세 가지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는 인터넷 사용 습관을 잘 들여야 한다. 처음 컴퓨터를 배우고 웹 서핑을 시작할 때부터 인터넷 사용습관이 건전하다면, 파워 유저가 된 뒤에도 심지어는 직업상 하루 종일 컴퓨터를 끼고 사는 사람이 된 뒤에도 좀처럼 인터넷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것은 사이버 세계에서도 통하는 속담이다. 두 번째는 인터넷 중독을 불러들이는 개인의 소인, 즉 주변의 환경, 가정 상황, 본인의 심리적 취약점 등등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런 소인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 중독이 아니라면 다른 중독에라도 빠질 가능성도 크다. 이를 위해서는 사이버 공간이 아닌 현실 공간에서의 대인관계를 늘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채팅이 아닌 경치 좋은 찻집에서의 로맨틱한 만남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채팅 중독에 빠질 수가 없다. 세 번째는 인터넷 중독자나 그 가족의 연대와 상호 교류가 필요하다. 인터넷 중독자나 그 가족들이 회복을 위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격려와 지지를 나누며, 유해 인터넷 환경 등의 중독 유발 요인들에 대하여는 사회적으로 연대하여 대처할 필요가 있다. 


** 올바른 컴퓨터 또는 인터넷 사용 습관 


(1) 할 일이 있을 때만 컴퓨터를 켠다.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키고, 심심풀이로 온라인에 접속하거나 연락 올 것도 없는데 공연히 전자메일을 열어보는 행동은 인터넷 중독의 기초를 다지는 짓이다. 


(2) 컴퓨터를 켜고 끄는 시간을 사전에 정하고 꼭 지키도록 한다. 


컴퓨터 사용은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하되, 되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일을 다 끝마친 후에 컴퓨터를 켜도록 한다.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순위를 따진 후에 일을 하도록 한다. 초등학생의 경우는 부모가 컴퓨터일지를 적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컴퓨터나 인터넷의 사용이 게임이나 채팅 등의 오락 목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한다. 


최근 어느 경제주간지에서 '리니지' 게임을 공급하고 있는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은 인터넷은 정보망이 아니라 오락망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고, 그러한 변화가 인터넷에 무관심했던 사람까지도 컴퓨터 앞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컴퓨터를 주로 오락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잘 해야 디지털 소비자요 심하면 인터넷 중독증 환자가 될 뿐이다. 설령 시작을 오락으로 했더라도, 인터넷이나 컴퓨터의 사용이 게임, 채팅 등의 오락 목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사실, 인터넷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별 가치 없는 자료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포르노그래피나 엽기물 외에도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조롱, 농담, 애완동물이나 UFO의 사진 등이 가는 곳마다 발에 채이고, 게시물의 50%이상이 퍼온 글이라고 한다(라도삼, 블랙인터넷, 지우, 2001).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는 목적이 재미를 찾기 위한 것으로 길들여져 버리면 인터넷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일부 학자들은 앞으로의 정보 격차, 특히 국가간의 지식정보 격차는 컴퓨터나 인터넷을 가졌는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누구나 가질 테니까),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 한다. 즉, 미래 사회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일을 하고 서비스를 만들어 냄으로써 돈을 버는 사람과 그렇게 생산된 서비스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돈을 내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며, 결국 전자는 디지털 시대의 귀족이 되고 후자는 노예로 전락한다는 무서운 이야기다.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이 인터넷과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혹시 돈을 벌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돈과 시간을 쓰는 일일뿐인가? 한 번 곱씹어볼 일이다. '리니지' 게임을 하는 사람은 확실히 인터넷을 오락망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 게임을 만들어서 돈을 번 사람은 컴퓨터를 오락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를 가지고 게임을 개발하는 '힘든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불필요한 게임과 엔터테인먼트용 북마크들을 삭제하여 자신의 컴퓨터를 최적의 상태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는 웹 저작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하나 배워 보거나 컴퓨터-인터넷 관련 자격증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4) 인터넷과 컴퓨터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용한다. 


공부방에 있는 컴퓨터를 거실로 옮겨 놓고 가족의 주목 하에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 한 번에 계속해서 너무 오랜 시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쉬는 시간에 계속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지 말고, 그 쉬는 시간 동안 적절한 운동을 하도록 한다. 또한 모니터 앞에서 식사나 간식을 하지 않도록 한다. 가급적 정기적으로 컴퓨터 앞을 떠나야 한다. 이것은 인터넷 시간 왜곡 현상을 방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Posted by Happy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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